눈꽃세상의 일상

♧ 여행 이야기/ 그 섬, 그 바다

구룡포, 호미곶

눈꽃세상 2017. 9. 2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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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4일

포항에서 200번 버스를 타고 구룡포에 왔어요 [11시10분]

전국 대개 생산량의 57%가 구룡포산이랍니다






항만을 따라 조성된 공원길






한 기념한다고 했는데 ㅋ

대개를 머리에 이고 있네요

간판 조형물크기를 비교해보니  뭔가 설명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동해 최대의 어업전진기지였던 구룡포는 일제 강점기인 1923년 일제가 구룡포항을 축항하고 동해권역의 어업을

관할하면서 일본인들의 유입이 늘고, 그러면서 현재 구룡포 인본인 가옥거리가 위치한 거리에는 병원과 백화상점,

요리점,여관 등이 늘어서고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지역상권의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남아 있던

일본 가옥들은 각종 개발과정에서 철거되고 오랜 세월동안 훼손되면서 과거 우리 민족에게 아팠던 역사의 산 증거들이

사라져가는 실절이 되었고, 이에 포항시는 지역내 가옥을 보수 정비하여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풍요했던 생활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상대적으로 일본에 의해 착취되었던 우리 경제와 생활문화를 기억하는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를 조성했습니다.

2011년 3월부터 시작된 정비 사업을 통해 457m 거리에 있는 28동의 건물을 보수한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는

2012년 12월 국토해양부가 주관하는 제2회 대한민국 경관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도심활성화 사업의

우수사례로 선정되었습니다.



















70개의 계단 위로 충혼탑과 구룡포과메기 기념관 등이 있습니다.







[구룡포 공원 입구 계단 돌기둥]

이 곳 계단과 돌기둥들은 1944년 일본인들이 세웠으며 돌기둥은 왼쪽 61개 오른쪽 59개 등 120개가 있습니다

돌기둥에는 구룡포항을 조성하는데 기여한 구룡포 이주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패전으로 인본인들이 떠난 이후 구룡포 주민들은 시멘트를 발라 기록을 모두 덮어버리고 돌기둥을 거꾸로

돌려 세웠습니다. 그 뒤 1960년 구룡포 주민들이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봉안할 충혼각을 세우는

과정에 도움을 준 후원자들의 이름을 다시 앞뒤를 돌려 세운 돌기둥에 새겨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구룡포를 상징하는 아홉마리 용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

이 비는 일본인 '十河彌三郞'를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랍니다.

'도가와 야스브로'는 일제강점기에 구룡포 방파제 축조와 도로개설 등에 관여한 사람으로

인본인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일본에서 규화목을 가져와 해방전인 1944년 경에 송덕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송덕비는 패전 후 일본인들이 돌아간 후 구룡포 주민들이 시멘트로 덧칠하여

현재 비문의 내용은 알 수가 없답니다.


간월산 규화목이 생각나는 시간입니다.








공원에 게시된 구룡포 사진들






충혼각



















운해하는 배가 아닌 거리공원에 전시된 배입니다. [구룡포]호






12시 5분에 구룡포를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호미곶에 왔어요[12시25분]






호미곶 대포2리

호미곶은 한반도의 최동단에 위치, 한반도 지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이곳을 일곱번이나 답사 측정한 뒤 우리나라의 가장 동쪽임을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16세기 조선 명종때 풍수지리학자인 격암 남사고는 이곳을 우리나라 지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기술하면서 천하 제일의 명당이라 하였고,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으로 한반도를 묘사하면서 일출제일의 이곳을 조선십경의 하나로 꼽았습니다. 호랑이는 꼬리의 힘으로 달리며 꼬리로 무리를 지휘한다고 하여 호랑이 꼬리는 국운상승과 국태민안의 상징이겠기에, 여기 호미곶에 일제는 쇠말뚝을 박아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으려 하였으며 한반도를 연약한 토끼에 비유해 이곳을 토끼꼬리로 비하해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천문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이곳 호미곶의 일출시각은 아침 7시 32분('99. 1. 1일 기준)으로 명실공히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으로 이곳에서 1999. 12. 31. ~ 2000. 1. 1.에 걸쳐 새천년 국가행사로 한민족 해맞이 축전이 개최되었습니다.





호미곶 관광안내도입니다.

아쉽게도 다 둘러볼 수는 없어요. 열차시간의 압박 때문에 ㅠㅠ





새천년 기념관은 이렇게만 담고 패쓰






해맞이 광장입니다.






휴일을 맞아 엄청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나 봅니다.







 [광장 조형물 '상생의 손']

인류가 화합하고 화해하며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의미로 만들어진 청동조각물입니다.

바다에는 오른손이, 육지에는 왼손이 있습니다.







왼손을 펴야 하잖아 ~

난 오른손이네 ㅋ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 상

157년(아달라 4) 동해안에 살던 연오랑은 바닷가에서 해조를 따다가 갑자기 바위가 움직이는 바람에 일본에 건너갑니다. 이를 본 왜인들은 연오랑을 비상한 사람으로 여겨 왕으로 삼았습니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그를 찾아나섰는데 남편의 신이 바위 위에 있었습니다.

바위에 올라갔더니 바위가 움직여 세오녀도 일본에 가게 됩니다. 이에 부부는 다시 만나고 세오녀는 귀비(貴妃)가 되었습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일관(日官)은 우리나라에 있던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일본으로 가버려서 생긴 괴변이라 했습니다. 왕이 일본에 사자(使者)를 보냈더니 연오랑은 세오녀가 짠 고운 비단을 주며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된다고 했다. 신라에서 그 말대로 했더니 해와 달이 빛을 찾았다. 이에 왕은 그 비단을 국보로 삼고 비단을 넣어둔 임금의 창고를 귀비고(貴妃庫),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 했습니다.

이 설화는 그 내용을 비롯하여 주인공의 이름과 지명 등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태양신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흔적은 지금도 영일만, 즉 '해맞이'라는 뜻의 지명 속에 남아 있습니다. 연오는 태양 속에 까마귀가 산다는 〈양오(陽烏)전설〉의 변음으로, 세오도 쇠오, 즉 금오(金烏)의 변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니혼쇼키 日本書紀〉의 〈천일창설화 天日槍說話〉도 태양신화인 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동남해안과 일본의 이즈모[出雲] 지방이 문화의 전승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의 오른손 [상생의 손]







중지에는 갈매기가 앉지 않았네요

어디 마실 갔을까요?






따라쟁이 ㅋ~







호미곶은 해파랑 15길에 해당합니다.






방위표시도







 뒤로 [虎尾串燈臺] 경상북도 기념물 39호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등대로서 1908 년 12 월 20 일 신설 점등하였습니다. 등탑의 높이는 26.4m 이고 둘레는 밑부분 24m, 윗부분 17m 이며 내부는 6 층으로 되어 있고요 . 등탑은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붉은 벽돌만으로 조적된 팔각형으로 18 세기 중반 르네상스식의 건축물로서 장식적인 문양을 출입문에 설치하고 창문의 위치를 각층마다 다르게 하여 통풍이 잘되게 하였고 비를 막을 수 있도록 설치하였습니다 . 또한 각 층의 천장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표상하는 오얏꽃문양 ( 李花紋 ) 이 조각되어 있으며 , 계단은 철재 주물로 108 단을 설치하였습니다.







문어와 함께







등대박물관 모형







청포도 시비 입니다

이곳에서 휴식하며 에너지 보충









































물메기는 아닌 것 같고요

엄청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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